강신주 - 감정수업
그러니까 사랑은 사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오랜 시간동안 사랑은 사회적 차원의 문제에서 다루어져 왔다. 예수의 사랑도 그렇고, 싯다르타의 자비도 그렇고, 공자의 인도 마찬가지다. 사유재산 제도가 관철되면서 사랑도 사적인 영역으로, 결혼 제도와 일정 정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다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사적인 차원에 국한되어 있든 공적인 차원으로 확장하든 간에, 사랑의 원리는 소유의 원리와 달리 무소유의 원리를 토대로 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애인......추위를 무릅쓰더라도 자신의 옷을 벗어 줄 것이다. 이럴 때 두 사람은 최소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공동체의 범위는 우리가 자신이 가진 것을 어디까지 나누어주느냐에 의해 측정될 수 있다.....공동체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랑의 원리가 관철되지 않는다면, 공동체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커플 사이에도 무소유의 원칙, 사랑의 원리가 희석되고 있는 불행한 시대다.
합리적인 것처럼 쿨하게 더치페이를 외치고, 여자도 남자와 동등하게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 바닥에는 자기 것을 지키겠다는 강한 소유의지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항상 떠날 준비를 하라! 상대방에 대해 항상 자유로워라!
이것만큼 상대방이 나에게 무관심해지거나 심드렁해지지 않도록 만드는 확실한 방법도 없다.
떠날 수도 머물 수도 있는 사람만이 누군가의 곁에 머물 수 있다.
이런 주인으로서의 당당한 자유를 가슴에 품고 있을 때에만 상대방도 우리를 주인으로 대우할 것이다. 모든 경우에서처럼 주인은 관심을 받고, 노예는 무관심에 방치되는 법이니까.
그러니까 언제든지 나는 상대방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어야만 하고, 또 상대방이 그런 사실을 잊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럴 때에만 상대방은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고, 동시에 정말로 나를 사랑한다면 내게 기쁨을 주려고 노력할 것이다.
내가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한다고 상대방이 생각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나의 내면의 섬세하게 읽으려는 노력을 접을 것이고, 그만큼 나에대한 사랑도 식을 테니까 말이다.
우리는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과 함께 있으려고 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상대의 단점 보다는 장점을 발견하는 놀라운 재주가 있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경탄하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그러니 어떻게 내가 가진 치명적인 단점이 그의 눈에 들어올 리 있겠는가.
그래서 애인은 우리에게 다른 타인이 결코 줄 수 없는 자긍심을 되찾아줄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나의 모든 면에 무관심하거나 혹은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좋은 친구 혹은 좋은 동료일 수는 있어도 말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강한 자존감 없이는 쉽게 지킬 수 있는 욕망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비루함을 “슬픔 때문에 자기에 대해 정당한 것 이하로 느끼는” 감정이라고 정의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역서 ‘슬픔’에 주목해야 한다. 어린 시절 부모가 칭찬보다 비난과 험담을 일삼았다면, 우리는 성장해서도 항상 슬픔의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아무리 잘해도 비난을 받는다면, 누구나 자신의 행위를, 심지어 자신의 존재마저 무가치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슬픔의 정조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유년시절에 만들어진 슬픔이 하나의 습관처럼 내면화될 때, 우리는 자신을 항상 비하하는 감정, 즉 비루함에 적어들게 된다. 습관화된 슬픔,혹은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슬픔, 그것이 비루함이라는 감정의 실체다.
고질적인 슬픔을 천천히 치유해 줄 사람이 필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랑만이 비루함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법이니까.
어른이 된다는 것, 그것은 감정을 억누르거나 죽이는 기술을 얻었다는 것 아닐까요?
어른이 된 다음부터는 별로 기억나는 추억이 없는 것 같습니다. 감정이 움직여야 기억나는 것도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냥 모든 것을 무감각이나 무감동의 상태로 흘려보내 버린 겁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더 나이가 들어 오늘을 되돌아보았을 때 기어가는 것이 하나도 없는 삶이 말입니다. 억압되다 못해 이제는 거의 박제가 되어 버린 감정을 회복해야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한 번 뿐인 삶을 제대로 영위하기 위해서지요.
감정이란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감정이 없다면 삶의 희열도, 삶의 추억도, 그리고 삶의 설렘도 없을 테니까요.
감정을 죽이는 것, 혹은 감정을 누르는 것은 불행일 수밖에 없다. 살아 있으면서 죽은 척하는 것이 어떻게 행복이겠는가. 그러니 다시 감정을 살려내야만 한다. 이것은 삶의 본능이자 삶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어떤 감정이든지 간에 그것이 내 안에서 발생하고, 또 나 자신을 감정들의 고유한 색깔로 물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이다. 슬픔,비애, 질투 등의 감정도 우리에게 소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랑의 감정은 바로 우리를 현재에 살도록 하고, 안전한 삶에 다한 생각은 우리를 미래에 살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안전한 삶을 위해 현재의 열정적인 감정을 교살하는 삶,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삶이 과연 행복할까?
아이러니하게도 미래에 더 큰 가치를 두느라 현재를 부정하는 삶이 이르게 되는 종착역은 바로 죽음이다. 이것은 유한한 삶의 진실이다.
화려하게 절정에 이르렀다가 언젠가 지게 되는 꽃처럼, 사랑이란 감정도 그렇게 지는 순간이 올 것이다. 이런 서글픈 순간에 그녀를 휘감고있는 감정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