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이야기

금정산에서의 '도' - 국민을 보살펴야 하는 정치에서 빚어지는 아픔

返初 2015. 3. 6. 17:51


 범어사 - 원효암을 거쳐 금정산성 가는 길에 '평화'라는 화두에 집중해 보았다. 폭력에 대한 투쟁, 그 투쟁에서 오는 또 다른 폭력, 폭력의 악순환은 폭력을 낳는다는 생각이 전해져왔다. 

 우리 역사는 끝없는 투쟁의 역사였고 그 폭력에 반하는 평화를 얻기 위한 평화적 시위와 강경 시위를 실천한 '보통사람'들의 힘이 지금의 항구적 평화체제로 느껴지는 민주주의를 안착시켰다.

 그러나 이제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경제적 살인의 시대, 법적 살인의 시대에서 보통 사람들은 대부분 굴종의 길을 택한다. 이 마저도 순탄치 않은 길임을 알면서도 이 체제에 다시 한 번 기회를 준다. 어찌보면 절망적 선택일 것이고 또 어찌보면 어떻게서든지 희망을 가져보려는 몸부림일 것이다. 

 이미 우리나라는 담뱃세를 제외한 실질 물가상승률이 마이너스가 되버렸다. 거기다 대기업과 강소기업등 보이는 지표에다가 보이지 않는 자영업자의 비율까지 잠정적으로 합친다면 마이너스 성장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가계부채, 부동산부채, 국채, 금융부채 갖은 부채들을 총망라 한다면 이미 우리나라는 디플레이션 위기 상황에서 살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을 것이다. 언론의 통제와 여 · 야의 안일한 정치공학적 골몰에 의한 정사'政事'가 많이 없었다면 이미 보통사람들은 길 위에서 움직였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위기의 심각성은 일상처럼 당연시 되고 자신의 몸이 망가지고 가정이 무너지고 사랑이 사라지는 데도 이 모든 인간파괴적인 현상들이 그저 자연의 순리처럼 느껴지기에 폭력의 날이 문제의 근본적 원인이 되는 곳에 메스를 대지 못하는 것이다.

 그 결과 병은 깊어지고 자신을 제어하지 못한 사람들은 타인을 향해 폭력을 행사하거나 자신을 향해 자해를 가한다. 무기력의 반복됨은 사람들을 정체시킨다. 이 폭력에 대한 멈춤은 언제 극복될 것인가? 또 어떻게 극복될 것인가? 평화는 과연 올 것인가?

 투쟁의 원동력은 절망의 한계점에 도달한 분노한 사람들의 연대로 인해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들도 소수일 것이다. 너무나 비대해진 사유(有)된 권력의 막강한 통제력은 유럽의 스페인이나 그리스처럼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여러분들은 그리고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 것인가? 우선 자기자신을 지켜야 한다. 자신을 존중하고 긍정하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보편화된 일상의 폭력에 의해 파괴되는 인성을 주위에서 너무나 많이 지켜봐왔다. 이러한 극단적 폭력은 더 큰 폭력으로 비화(될 것이다.

 우리는 극단적 혼란함이 다가왔을 때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폭력의 전화(化)를 겪고 히틀러를 불러올 것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어 다시 한 번 민주주의를 쟁취할 것인가? 스스로의 선택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