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5. 2. 02:25

금기된 사랑과 포근한 사랑에 대한 성찰 - 강신주

사랑의 핵심은 사랑하는 것보다 사랑받으려는 데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사랑은 자신이 기쁨을 유지하기 위해서 상대방을 요구하는 감정이라는 것, 이것은 촉각에도 그대로 통용되는 사실이 아닐까요? 내가 애인의 몸을 만지고 싶은 진정한 이유는 상대방으로부터 만져지기를 원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애인을 껴안을 때, 상대방도 자신을 꼭 껴안고 있다는 느낌, 이것만큼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도 없을 겁니다. 어쩌면 우리는 엄마가 되기보다는 항상 어린아이가 되기를 원하는 존재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엄마로부터 받은 따뜻한 포옹이 오늘도 애인에 대한 포옹에서도 반복되고 있으니까 말이지요. 이것은 성적으로 성숙한 두 인간 사이에 벌어지는 섹스에 버금가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르트도 이 점을 명확히 알고 있었지요. 


"성교 외에도 부동의 껴안음이란 또 다른 포옹의 형태가 있다. 우린 마술에 걸린 채 황홀해하며, 잠자지 않고 잠 안에 있으며, 잠들기의 그 어린애 같은 쾌감 속에 있다. 그것은 옛날이야기의 시간이요, 나를 고정시키고 마비시키는 목소리의 순간이요, 어머니에로의 되돌아감이다. (…) 그렇지만 이 어린애 같은 포옹 한가운데서도 생식기적인 것은 어쩔 수 없이 솟아올라, 근친상간적인 포옹의 그 분산된 관능을 차단한다. 그러면 욕망의 논리가 다시 작동하고, 소유의 의지가 되돌아오며, 어린이 아이 위에 이중 인쇄된다. 나는 모성적인 것과 생식기적인 것을 원하는, 동시에 두 명의 주체이다." - 롤랑바트르, 『사랑의 단상』


바르트는 애인을 품에 안을 때 발생하는 편안함과 따뜻함을 쾌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는 포옹에서 오는 쾌감은 “어머니에로의 되돌아감”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지만 바르뜨는 성숙한 남녀 사이의 포옹이 가진 분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만져지고 있다는 나른한 쾌감 속에서 갑자기 생식기적 본능이 출현하기 때문이지요. 포옹이 수동성, 편안함, 지속성에 강조점이 있다면, 생식기적 본능은 능동성, 불안함, 단발성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따뜻한 젖을 배부르게 먹고 엄마의 품에서 잠드는 노곤함이 포옹이라면, 속이 불편해서 갑자기 설사라도 하는 것처럼 급작스러운 것이 성교라고 할 수 있으니까 말이지요. 


포만의 지속과 배설의 욕구는 분명 이질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르트는 말합니다. “나는 모성적인 것과 생식기적인 것을 동시에 원하는 분열된 주체”라고 말이지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분열성은 가장 민감한 촉각 능력과 생식 능력이 성기라는 동일한 기관에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생긴다는 점입니다. 부드럽게 만져주었을 때 가장 만족스럽고 편안한 쾌감을 주지만, 동시에 어느 순간 급작스런 절정에 치달으려는 격정적 쾌감도 함께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지요. 주의해야 할 것은 성기적 사랑을 단순히 종족 보존을 위한 본능이라고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불행히도 이런 착각은 플라톤(Plato, BC428?-BC348?)에서부터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까지 어쩌면 지금도 통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타이유(Georges Bataille, 1897-1962)는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철학자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를 통해 우리는 성기적 사랑도 사회적 의미에 깊이 물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에로티즘의 역사(L'histoire d'érotisme)에서 바타이유는 말합니다.


 “금기의 대상은 금지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강력한 탐욕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성적인 것과 관련이 있는 금기는 대체로 대상의 성적 가치(혹은 에로틱한 가치)를 강조하는 결과를 낳는다”


고 말이지요. 다시 말해 성기적 사랑의 강렬함은 어떤 금기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성기적 사랑은 어떤 금기를 전제하고 있는 것일까요? 다행스럽게도 애커만의 이야기는 우리 의문을 해결하는 데 실마리를 제공할 겁니다. 


누군가를 만지고 싶은 열정과 누군가가 만져주기를 바라는 욕망에도 불구하고, 나라마다 금기시하는 신체 부위가 있다. 미국에서는 남자가 허락 없이 여자의 젖가슴이나 엉덩이 혹은 생식기를 만지는 것은 금기이다. (…) 피지에서는 누군가의 머리칼을 만지는 것은 미국에서 처음 보는 사람의 생식기를 건드리는 것과 같다. 벌거숭이라고 사는 원시 부족에게도 몸에서 건드리면 안 되는 금기가 있다. 사실 금기가 사라지는 상황은 딱 두 가지다. 상대의 몸을 마음대로 만질 수 있는 연인들 그리고 엄마와 아기.- 다이앤애커먼, 『감각의 박물학』


에커만의 이야기를 뒤로부터 읽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네요.


 “금기가 사라지는 상황은 딱 두 가지다. 상대의 몸을 마음대로 만질 수 있는 연인들 그리고 엄마와 아기.” 


흥미로운 구절이지요. 사랑하는 두 사람만이 사회적으로 규정되는 신체적 금기를 넘어설 수 있다는 사실이 말이지요. 이것은 역으로 말해서 사회적 금기를 넘어서지 않는다면,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바르트의 생각과는 달리 ‘생식기적인 것을 원하는 것’과 ‘모성적인 것은 원하는 것’은 대립적이지는 않았던 셈입니다. 단지 생식기적 사랑은 성기를 금기시하는 사회에 더 강하게 영향을 받고 있을 뿐이니까 말이지요. 그러니까 금기 대상인 성기를 소유함으로써 우리는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던 겁니다. 물론 피지에서 사랑에 빠진 사람은 상대방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려고 안달하겠죠. 

불행한 일이지요. 사회적 금기를 반복하고 있는 상대방이 자신의 성기를 함부로 보이거나 만지도록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성기를 만질 수 있거나 섹스를 할 때에만 상대방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으니까 말이지요. 흥미로운 것은 성기에 금기가 집중되어 있는 사회는 대부분 가부장제의 지배를 받는 사회라는 점입니다. 재산과 권력을 자신의 혈육에게 양도하기 위해서, 가부장제 사회는 순결과 금욕의 이데올로기를 만든 것으로 유명하지요. 우리 사회의 경우도 미국이나 프랑스와 별다른 차이가 없는 사회입니다. 어쩌면 더 심할 수도 있을 겁니다. 여기서 잠시 우리 사회에서 키스가 어떻게 변동했는지 생각해보도록 하지요. 한때는 입술도 성적 금기의 대상 중 하나였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키스는 이전보다 훨씬 더 자유로워졌습니다. 물론 아직도 성적 금기의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도 많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키스가 자유로워졌다는 것은 키스가 금기의 행위가 아니라 친밀감과 편안함의 감각으로 이행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키스만으로 사랑을 확인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셈이지요. 

성기적 사랑에 대한 집착은 우리 사회가, 혹은 우리 자신이 어떤 금기를 반복하고 확대재생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결국 금기를 넘어서 “상대의 몸을 마음대로 만질 수 있는” 사이가 된다고 할지라도, 두 사람이 성기적 사랑으로부터 자유롭기는 힘든 법입니다. 두 사람은 성기를 통한 성교로 금기를 넘었다는 기억을 공유할 테니까 말이지요. 라캉이 “성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il n'y a pas de rapport sexuel)”라고 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남녀 사이에 순수한 성적인 관계란 존재하지 않고, 오직 사회적으로 규정된 성적인 관계만 존재한다는 의미이지요. 그렇다면 사회 금기체계에 포섭되지 않는 성관계, 서로의 몸 중에서 성기와 같은 어떤 특정 부위에 고착되지 않는 성관계란 불가능한 것일까요? 물론 이론적으로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것은 포옹과 같은 성관계, 혹은 ‘성기적인 것’을 나름대로 극복하고 ‘모성적인 것’이 강해진 성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조바심과 급작스러움이 사라진 성관계이겠지요. 물론 성교와 일정 정도 관련이 있기 때문에 ‘모성적인’ 성관계도 어떤 절정으로 끝나게 될 겁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느긋함의 향유와 같은 모습으로 진행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