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나는 내가 가슴속 깊이 존경하는 스승 한 분을 만나 뵈었다. 고려대학 영문과를 은퇴하신 김우창 선생님이다. 나는 하버드 대학에서 학위공부를 하는 동안에, 김우창 선생께서 객원교수로 오셔서 바로 내가 사는 곳 앞에 거처를 마련하고 계셨다. 2년 가까이 김 선생님을 모시면서 나는 너무도 많은 것을 배웠다. 학문을 하는 태도라 할까, 학문 그 자체의 궁극적 의미라 할까, 하여튼 이런 문제에 관하여 김우창 선생님은 나에게 심오한 영향을 주셨다. 학문의 의미는 결국 나의 현재적 삶의 깨달음의 역정일 뿐이라는 교훈을 몸소 무언(無言)으로 보여주셨다. 내가 한국에 돌아와 첫 글을 발표한 계기도 선생님께서 민음사 <세계의 문학> 잡지 편집주간으로 계시면서 마련해주셨다. <세계의 문학>에 실린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는 매우 단순한 번역문제를 다룬 글인데, 대한민국 지성계의 가히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양심선언을 발표하고 고려대를 떠났다가, 노태우 정권 때 다시 복직을 시도하자 철학과 교수님들께서 일치단결, 나의 복직을 막았다. 이때도 고려대에 도올과 같은 인재가 안 돌아오는 것은 고려대의 불행이라고 말씀하시며 복직운동을 해주신 유일한 분이 김우창 선생님이셨다.
지금 이런 옛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해야 할 이야기는 최근 김우창 선생님을 만나 나눈 내용과 관련된 것이다. 나는 늘 선생님의 학경(學境)에 대한 향심이 있으면서도, 30년 가까이 선생님을 찾아뵙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 작심하고 만나 뵌 것이다. 나는 뵌 김에 우리나라 미래에 관하여 정말 긴요한 과제상황이 무엇인지를 선생님께 여쭈어보았다. 선생님은 주저 없이 다음의 세 가지를 말씀하셨다. 아마도 이것은 평생을 진실하게 공부해온 노학자가 느끼는 ‘대인의 우환’과도 같은 것일 게다. 우리 모두에게 경종을 울리는 마음의 소리라서 여기 대선 인터뷰의 서막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그 첫째가, “도덕회복”이다. 이 말은 매우 진부하게 들린다. 늙은 꼰대의 상투적 얘기로 오해될 수 있다. 그러나 김우창 선생님의 이 말씀은 매우 심오한 새로운 것이다. 도덕에 관하여 20세기의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이모티비즘(emotivism)의 주장을 외쳤다. 모든 도덕적 명제가 결국 알고 보면 검증 가능한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제기랄!” “예이끼!” “기분 나쁘다” 하고 아무 의미 없이 감정을 토로하듯이, 모든 도덕적 판단이 결국 발설자의 감정(emotion)을 표명하는 외마디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20세기 인류의 도덕관이 극단적인 회의주의 혹은 허무주의에 빠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모티비즘 이전의 근세 서양윤리관은 기껏해야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utilitarianism)로 귀결된다. 그런데 어떠한 경우에도 도덕은 공리주의적 계산으로 다 해결될 수가 없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과연 어떻게 계산할 것인가? 행복을 과연 쾌락의 지수에 의하여 계산할 수 있을까? 신자유주의자들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고 믿는 자본주의 체계가 과연 이 세계를 도덕적인 최선으로 휘몰아가고 있는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 최선이 아닌 최악일 수도 있다.
김우창 선생님의 말씀은 도덕이란 이런 공리주의 계산을 뛰어넘는 우리 양심의 명령이나 보편적 선의지, 칸트가 말하는 정언명령(조건절이 없는 절대명령)과도 같은 것이며, 그 도덕이 가장 잘 표현된 것이 우리 전통사회가 가지고 있던 인의예지와도 같은 절대규범이라는 것이다. 인의예지의 정언명령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정치가의 ‘솔선수범(teaching by example)’이며 정치의 당위적 임무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도덕을 회복해야만 한다!
둘째가 “경제평등의 구현”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이미 양극화·갈등의 문제로서 김종인 대표가 충분히 지적한 주제이므로 재론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김우창 선생님은 이 경제 평등의 문제도 그 핵심은 공리주의적 계산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너만 먹기냐? 나도 같이 먹자!”는 식의 질투·질시의 공리적 평등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즉 니체가 말하는 ‘르쌍띠망(ressentiment: 원망의 뜻인데, 약자의 강자에 대한 증오·복수심리)에서 우러나오는 평등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논의되고 있는 금수저-흙수저론에 대하여도 김 선생님은 그것은 삶의 스타일에 관한 것이지 근본적인 수저계급론이 될 수는 없다고 말씀한다. 문제는 금수저이든 흙수저이든 수저의 기능은 밥을 먹는데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같이 즐겁게 밥을 먹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 금수저냐 흙수저냐 하는 문제에 과도하게 집착할 필요는 없다. 인간으로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반을 파괴하는 구조를 개혁하는 것이 중요하다.
셋째로 지적하신 문제가 자연과의 화해, 즉 환경문제였다. 김 선생님은 지속가능한발전위원회(SDC: Sustainable Development Commission)의 위탁으로 영국 경제학자인 팀 잭슨(Tim Jackson, 1957년생)이 쓴 <성장 없는 발전(Prosperity Without Growth)>이라는 책이 구현하고자 하는 정신, 세계지성들의 새로운 정신적 트렌드를 말씀하신다. 경제(economy)란 원래 ‘짜게 쓴다’, ‘절약한다’는 말이다. 즉 경제는 본시, 검약과 절약의 노모스(규범)였다. 그런데 언젠가 ‘소비가 미덕’이라는 거짓말이 판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장 없는 번영’이란 곧 ‘소비 즉 낭비 없는 번영’을 의미한다. 경제학은 반드시 철학과 재결합되어야 한다.
“반소사음수(飯疏食飮水)하고 곡굉이침지(曲肱而枕之)해도 낙역재기중의(樂亦在其中矣)”라고 말한 공자의 의중을 깊게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환경 말씀을 하시면서 나에게 하신 여러 말씀 중에서 나의 폐부를 찌른 명언이 하나 있다.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자연과 더불어 살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서울사람들이 그나마 행복할 수 있는 가장 큰 조건이 바로 북한산을 끼고 있다는 것이다. 김 선생님은 영문학자로서 나에게 대오(大悟)의 한마디를 던졌다. “요즈음 한국시가 엉터리예요. 시단이 사라졌어요. 시에서 자연이 사라졌기 때문이죠. 김 선생님이 좋아하는 한시가 뭔 줄 아세요. 한시는 매 줄마다다 자연을 읊어요. 장엄한 애국정서를 말해도 자연을 읊고, 이별의 슬픔이나 재회의 환희를 말해도 다 자연을 빌어 말하죠. 김 선생님 같은 분이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부지런히 한시를 가르쳐주어 자연의 위대함, 그 불가항력적인 권위를 일깨워주어야 합니다. 정말 부탁드려요. 인간은 자연이 없이 행복할 수 없어요.”
[출처: 중앙일보] [특별기획│2017 대선주자 릴레이 인터뷰] 도올 이 묻고, 남경필이 답하다 “자주적 국가로 코리아리빌딩!”
-http://news.joins.com/article/207650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