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6건
- 2016.01.06 87년의 양김 분열의 반복은 국민을 죽음으로 몰아 넣는다. 2
- 2015.08.26 현대 자본주의의 위기진단과 개인이 나아가야할 방향
- 2015.03.11 그람시의 통찰과 정신
- 2015.03.06 금정산에서의 '도' - 국민을 보살펴야 하는 정치에서 빚어지는 아픔
- 2015.02.09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 - 손석춘
- 2015.01.13 정치의 한계는 곧 인간의 한계라 볼 수 있지 않을까?
87년 민주항쟁으로 군부독재를 종식시킨 민주시민들의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후 김대중과 김영삼의 분열로 인해 노태우가 당선되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는 곧 군사독재 정권의 연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호남과 함께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이끌어낸 영남은 김영삼의 민자당 입당으로 인해 급속히 보수화되었다. 작금의 새누리당은 영남을 기반으로 패권적 질서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2016년 총선을 3달여 남겨놓은 지금 안철수와 문재인의 분열은 이러한 과거를 답습하는 것 같다.
2012년 대선에서 비록 서로 상처가 있긴 했지만 안철수의 희생으로 문재인은 박근혜를 사실상 이긴거나 다름없었다. (국정원, 사이버사령부, 경, 검이 합작한 대선개입으로 당선된 박근혜는 감옥에 가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번에 안철수가 탈당해버리면서 그 공은 모두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 이로인해 호남은 중도(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어떠한 선택을 할 거인지에 대한 기로의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외에도 영남을 제외한 충청, 강원, 서울, 경기 또한 더불어민주당, 안철수당, 새누리당의 3자 구도에서 새누리당의 압승이 예상되는 것이 현재의 흐름이다. 새누리당은 총선 목표를 180석을 잡고 있는데 이것이 현실화 된다면 '국회선진화법'을 거치지 않고 '개헌'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다. 개헌은 곧 이원집정부제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는 일여다야의 분열된 정당 구도와 지역주의, 세대차이, 언론정신을 상실한 언론환경을 바탕으로 '영구적 보수집권'이라는 새누리당의 플랜이 이번 총선에서 완성될 수도 있다고 본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일본의 자민당체제가 한국에서도 자리매김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엄중한 시국에서 우리 시민들은 할 수 있는게 별로 없다. 시위를 하면 잡혀가고 시위를 할 이유를 모르고 아르바이트도 해야하고 좋아하는 일도 해야하고 대학도 졸업해야 하고 취업도 해야하고 연애도 해야하고 결혼도 해야하고 가정도 지켜야 하고 자식도 키워야 하고 이 모든 것을 할 수 없어서 좌절하고 오늘도 하늘로 가실 40여 분들이 살고 있는 이 곳에서 우리가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은 투표밖에 없다.
이번 총선에서 진보야권은 특히나 김근태 정신, 즉 통합의 정신으로 더불어 민주당과 정의당이 최소 합당에 가까운 연대 정신을 보여주어야 한다. 아니 그냥 합당해도 좋다. 이 땅에 '민주주의'가 뿌리 내리기 전에는 더 이상의 분열은 온 국민을 재앙에 빠뜨릴 것이다.
끝으로 이 땅을 공존의 땅으로 만들 것인지 지금 이대로 살 것인지는 우리의 손에 달려있다. 양극화의 길로, 반민주적인 기득권의 틀에 갇혀살 것인지. 공정한 소득분배, 복지국가, 국민이 주인이 되는 길을 새로 만들 것인지에 대해서는 결국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선택은 우리가 하는 것이며 그에 따른 결과에 대해서는 그 마저도 겸허히 받아들이며 꿋꿋히 일상을 견뎌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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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한계는 곧 인간의 한계라 볼 수 있지 않을까? (0) | 2015.01.13 |
중국의 증시가 8%이상 폭락하면서 세계적으로 경제적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미국과 일본 등 세계 각국 증시도 줄줄이 폭락하여 중국 금융당국이 위안화 절하에 나선지 보름만에 세계 증시 시가총액은 1조 원의 만배인 무려 1경원이나 증발했다고 한다. 자본주의의 위기는 이미 미국발 리먼브라더스 사태로 인해 삐걱거리기 시작했었다. 이번 중국 증시 폭락사태는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으로 인해 부각된 금융시장의 거품으로 인한 세계적 경제시장 둔화의 영향으로 빠르게 누적된 부채경제는 수출주도형 성장모델의 한계를 불러왔다. 그렇다면 이러한 위기는 왜 발생하는 것인가?
우선적으로 경제적 성장을 위한 발판은 1차산업(농업)과 원자재 수출로 마련된다. 여기서 발전하여 2차산업으로 넘어가면 제조업이 발달하게 되고 제조업에서 남은 막대한 생산자의 잉여이윤는 3차산업의 상징인 금융업의 발달로 이어진다. 산업 선발주자들인 미국이나 영국을 필두로하는 소위 경제적 선진국 나라들은 3차산업의 정착으로 서비스산업이 자리잡았지만 후발주자인 중국은 2차산업에서 3차산업으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성장위기에 직면한다. 중국은 2000년대 초반부터 세계의 공장이라 불리며 저렴한 인건비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생산력이 중국의 제조업의 폭발적인 성장과함께 경제성장도 덩달아 하게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제조업의 빠른 발전은 중국 노동자들의 인건비 상승률에도 영향을 미쳤다. 세계투자자들은 이제 중국보다 더 저렴한 인건비를 가진 나라로 공장을 이전하게 되었다. 제조업의 성장은 둔화되고 있으며 잉여이윤의 대다수가 흘러들어간 주식과 부동산을 비롯한 금융시장에 있는 거품은 커질대로 커졌다. 내수의 진작보다 수출과 성장에만 중점을 둔 국가투자정책의 한계가 중국의 위기를 불러왔다고 본다. 뒤늦께 중국이 위안화 평가절하(고환율, 자국화폐가치 하락)로 사실상 환율전쟁에 돌입했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으로 수출을 늘리기에는 이미 늦은 시점일 것이다.(경제위기의 연착륙적 성격도 있다)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로 달러 대비 환율가치를 절하하고 있는 시점이기 때문에 환율정책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크지 않을듯 하다. 현재 진행중인 중국발 경제위기는 다시 한 번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의 한계를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위험한 계기다.
자본주의가 건강하게 돌아가려면 흘러가는 강물처럼 계속해서 지천으로 하천으로 쭉 흘러가야 한다. 막히지 않고 고루고루 흘러가야 주위의 생명들이 살 수 있다. 그러나 강물이 댐에 막혀버리면 물이 고여 썩듯이 자본의 흐름 또한 제대로 순환하지 못한다면 결국 다시 한 번 세계적 대공황을 맞이하게 된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양극화'를 가져오게 된다.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이 이분화되면서 부의 독점은 생산자가 가져가는 흐름이 일반적이다. 자본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잉여이윤을 높이기 위해 다시 새로운 곳에 투자를 하게된다. 그러나 명민한 투자자들은 이윤이 날만한 곳이 아닌이상 위험한 투자를 기피하게 되고 쌓여만 가는 이익유보금은 점점 몰리게 된다. 이러한 이익유보금은 주식이나 부동산으로 흘러들어가거나 금융규제가 느슨한 나라의 은행으로 저장된다. 이렇게 해서 1%도 안되는 인구가 세계의 50% 이상의 부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부의 양극화는 더욱더 심화될 것이다.
자본주의는 결국 필연적으로 북유럽의 복지제도를 세계적으로 수용하지 않는 이상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응당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도 그러하고 북한도 그러하고 그리스도 그러하고 아프리카도 그러하고 남미도 그러하다. 하지만 더 나아가 경제위기를 개별 국가들의 정책에 의해 관리되어야 한다는 패러다임의 한계는 점차 바뀌어 나가야 할 것이고 또 그렇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휘청거리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더이상 개별국가들의 정책적 대안으로만은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일국의 경제위기는 다른 국가들에게도 영향이 가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중국같은 세계의 공장이라 불려지는 제조강국이 침체를 겪게되면 중국에 투자한 세계의 많은 투자자들의 이익감소를 일으키기 때문에 전세계적으로 '경기악재'라는 암세포가 투자로 맺어진 혈관을 타고 퍼지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러나 이러한 복지국가라는 구조적 대안마저 오래 지속되기는 힘들 것이다. 인간은 소비를 해야만 행복할 수 있고 쾌락을 추구할 수 있다는 자본주의가 심어놓은 소비의 환상을 걷어내지 않는 이상 인간 개개인의 물질적 욕망은 서로를 경쟁하게 만드는 구조를 결코 포기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경제가 성장을 하고 100년전에 비해 압도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는 소위 경제적 부를 쟁취하는데 성공한 나라의 시민들마저도 결코 방글라데시아나 부탄같은 경제적 후진국에 비해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그나마 의식주가 충족된 삶을 사는 사람마저도 상대적 결핍으로 인한 정신적 우울증은 점점 더 늘어가고 있는 추세다. 이러한 개인적 박탈감 또한 자본주의의 동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동력으로 작용될 것이다.
필경 이제까지 쓴 글 모두를 종합하면 모든 위기의 근본적인 악의 축은 자본주의로 집약되지만 사실 자본주의는 죄가 없다. 상품을 융통하고 유통하는데 가장 최선의 체제였고 지구 역사상 가장 최단기간에 세계적으로 물질적 문명이 안정적이고 빠르게 이룩하는데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늦께나마 자본주의의 변명을 하는 것 같지만 이것은 변명이 아닌 사실이다. 자본주의는 사실 아무런 죄가 없다. 다만 그 돈을 굴리는 우리 인간이 더 가지려는 부푼 욕망이 이러한 세계적 경제위기와 양극화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지구에는 국가라는 개개인의 이기심을 대변하는 최고의 권위체들이 무려 237여 곳에 존재한다. 그 중 한 곳에 사는 5000만 시민 중 1명이 이러한 고민을 한다고 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냐만은 결국 지옥화된 이 세상의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세계적 연대와 개인의 각성과 깨달음(양심)에 기반한 새로운 지구시민적 체제가 요구되는 것이다.
헬조선, 지옥불반도라 불리우는 우리나라도 심각한 양극화를 겪고 있다. 우리 시민들은 저마다 살기위해(여유와 행복을 누리기 위한것이 아닌) 저녁도 없고 가정도 없이 밤낮으로 일하며 산다. 출구는 보이지 않으며 취업의 문은 점점 더 좁아지고 있다. 노동시장 개혁(개악이라고도 부른다)으로 사용자들의 갑질은 더 업그레이드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환경에서 우리 개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본인도 감히 이런말을 할 처지는 못되지만 인간관계의 회복, 주변 사람들과의(가족, 친구, 직장등등) 따뜻한 연대만이 고난한 헬조선에서 고단한 하루를 이겨내는 유일한 방법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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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의 투쟁
"우리는 이 자의 두뇌가 작동하는 것을 20년 동안 중지시켜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며칠 뒤인 6월 4일 판사는 그람시에게 파시스트 정권은 20년 4개월 5일형을 선고했다.
장기간의 감옥 생활은 원래 병약했던 그람시의 건강을 심각하게 악화시켰다. 이빨은 뽑혀 나왔고, 위장은 상해서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 없었으며, 고질적인 불면증은 더욱 악화되어 하루에 한두 시간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날이 계속 되었다. 그는 경련을 하면서 피를 토해야 했고, 극심한 두통으로 감방의 벽에 머리를 찧고는 했다. [옥중수고]는 그러한 고통 속에서 필사적으로 써내려간 그의 의지의 결정체이다. 또한 그는 틈나는 대로 줄리아와 두 아들 둘째 아들은 그가 구속된 후에 태어났으며 죽을 때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람시의 석방을 요구하는 국제적인 캠페인이 전개되고 그 압력에 못 이겨 파시스트 정권은 그람시를 병원으로 이송시켰다가 결국 사면시키지만 형을 마친 지 3일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던 바로 그 날, 뇌출혈로 조용히 사망했다.
왜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가
그람시는 계급지배의 다차원적 속성을 분석 하는데 헤게모니의 개념을 사용했다. 그람시가 말하는 헤게모니는 피지배 계급의 자발적 동의를 통해서 자신의 지배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헤게모니는 이를 가능하게 하는 '문화적, 도덕적,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지도력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헤게모니 그룹은 특정 정당 및 지식인 세력과 연합한 특정 자본가 세력이 주축이 되어 형성된다. 이를 제공해 주는 주요 공간으로 학교, 언론매체, 교회 등을 들 수 있다. 헤게모니 그룹의 이데올로기는 시대의 '상식'이 되며 이들 그룹의 이익은 '국가이익'으로 포장된다. 또한, 사회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그룹이 국가의 권력마저 장악하게 되면 헤게모니는 더 이상 시민사회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국가, 즉 정치사회의 영역에까지 확장되어 자신의 이익을 실현시키기 위한 강제적 수단 역시 확보하게 된다. 같은 맥락으로, 만약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그룹이 경제 위기 등의 특정한 상황으로 일시적으로 국가의 권력을 장악하게 된 그룹과 충돌하게 된다면 승자는 언제나 전자가 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다수결이 중요하며 헤게모니를 쥐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쉽게 대중적인 지지를 다시 끌어 모을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람시가 꿈꾸었던 혁명은 정권 탈취 방식의 기동전을 통한 혁명이 아닌, 대중과 깊이 연계된 유기적 지식인이 진지전을 통해 서서히 대중의 상식을 바꾸고 세계관을 변화시켜 그들 스스로가 혁명 세력의 진정한 일원이되게 할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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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 원효암을 거쳐 금정산성 가는 길에 '평화'라는 화두에 집중해 보았다. 폭력에 대한 투쟁, 그 투쟁에서 오는 또 다른 폭력, 폭력의 악순환은 폭력을 낳는다는 생각이 전해져왔다.
우리 역사는 끝없는 투쟁의 역사였고 그 폭력에 반하는 평화를 얻기 위한 평화적 시위와 강경 시위를 실천한 '보통사람'들의 힘이 지금의 항구적 평화체제로 느껴지는 민주주의를 안착시켰다.
그러나 이제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경제적 살인의 시대, 법적 살인의 시대에서 보통 사람들은 대부분 굴종의 길을 택한다. 이 마저도 순탄치 않은 길임을 알면서도 이 체제에 다시 한 번 기회를 준다. 어찌보면 절망적 선택일 것이고 또 어찌보면 어떻게서든지 희망을 가져보려는 몸부림일 것이다.
이미 우리나라는 담뱃세를 제외한 실질 물가상승률이 마이너스가 되버렸다. 거기다 대기업과 강소기업등 보이는 지표에다가 보이지 않는 자영업자의 비율까지 잠정적으로 합친다면 마이너스 성장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가계부채, 부동산부채, 국채, 금융부채 갖은 부채들을 총망라 한다면 이미 우리나라는 디플레이션 위기 상황에서 살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을 것이다. 언론의 통제와 여 · 야의 안일한 정치공학적 골몰에 의한 정사'政事'가 많이 없었다면 이미 보통사람들은 길 위에서 움직였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위기의 심각성은 일상처럼 당연시 되고 자신의 몸이 망가지고 가정이 무너지고 사랑이 사라지는 데도 이 모든 인간파괴적인 현상들이 그저 자연의 순리처럼 느껴지기에 폭력의 날이 문제의 근본적 원인이 되는 곳에 메스를 대지 못하는 것이다.
그 결과 병은 깊어지고 자신을 제어하지 못한 사람들은 타인을 향해 폭력을 행사하거나 자신을 향해 자해를 가한다. 무기력의 반복됨은 사람들을 정체시킨다. 이 폭력에 대한 멈춤은 언제 극복될 것인가? 또 어떻게 극복될 것인가? 평화는 과연 올 것인가?
투쟁의 원동력은 절망의 한계점에 도달한 분노한 사람들의 연대로 인해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들도 소수일 것이다. 너무나 비대해진 사유(私有)된 권력의 막강한 통제력은 유럽의 스페인이나 그리스처럼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여러분들은 그리고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 것인가? 우선 자기자신을 지켜야 한다. 자신을 존중하고 긍정하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보편화된 일상의 폭력에 의해 파괴되는 인성을 주위에서 너무나 많이 지켜봐왔다. 이러한 극단적 폭력은 더 큰 폭력으로 비화(飛火) 될 것이다.
우리는 극단적 혼란함이 다가왔을 때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폭력의 전화(轉化)를 겪고 히틀러를 불러올 것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어 다시 한 번 민주주의를 쟁취할 것인가? 스스로의 선택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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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세욱과 박영재 누가 죽였는가?
앞서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을 비판했지만 여전히 자기 성찰이 없을 사람들을 위해 정색을 하고 묻겠다.
허세욱, 박영재. 두 노동자를 누가 죽였는가?
그 물음을 4월에서 8월까지 모든 진보와 나누고 싶다. 먼저 허세욱. 그는 빈농의 9남매 가운데 다섯째로 태어났다. 고등학교에 입학에 공부하는 '행복'도 누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삶은 가방 끈 긴 그 누구보다 치열했다. 집회와 시위 현장은 물론, 주요 쟁점에 대한 토론회와 강연회를 빠짐없이 다녔다. 나 또한 서울시청 앞 광장 집회 때와 서울 명동 향린교회에서 열린 강연회 때 겸손이 몸에 밴 고인의 얼굴을 또렷이 기억한다.
고인은 생업인 택시를 몰며 민주노총 노동자로서 당당하게 살아갔다. 참여연대와 민주노동당에도 가입했다. 월간 <노동세상>에 따르면, 고인이 택시로 하루 340여 킬로미터씩 한 달을 꼬박 몰아 손에 쥔 돈은 100만 원 남짓이었다. 고인은 그 돈으로 여러 시민사회 단체 회비와 진보정당 당비를 꼬박꼬박 내고, 단체 활동가의 넉넉하지 못한 생활을 살뜰하게 챙겨주었다. 정작 자신은 끼니 거를 때가 많았다. 그 몸마저 결국 민중에 바쳤다.
2007년 4월 15일 허세욱은 분신의 고통 속에 숨을 거뒀다. 쉿넷. 열정과 헌신으로 살아온 삶이었다. 고인은 4월 1일, 한·미 FTA 협상이 벌어지던 호텔 앞에서 "한 · 미 FTA 즉각 중단하라"며 스스로 몸을 불살랐다. 구급차에 실려 가면서도 마지막 온 힘을 다해 한 · 미 FTA 중단을 절규했다.
아직도 노무현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면 도끼눈 흡뜨며 대뜸 욕설을 퍼붓는 윤똑똑이들에게 명토박아 들려준다. 당시 대통령 노무현은 허세욱이 분신한 바로 그날 밤 협정을 '타결'했다.
그 뒤 노무현은 진보세력의 비판을 받았고, 민주당은 재집권에 실패했다. 하지만 어떤가. 한 · 미FTA 협상 실무를 대표했던 자들을 보라. 김현종은 삼성전자 해외 법부담당 사장으로 '변신'했고, 김종훈은 새누리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가 강행한 한 · 미FTA 협정의 국회 비준을 저지하기 위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민주당은 국회에서 몸싸움을 벌여야 했다. 참으로 해괴한 사태 아닌가. 결국 국회에서 날치기로 비준됐다.
그래서다. 나는 민주당이 김대중과 노무현의 사진을 걸어놓고 집권을 다짐하기보다 언제나 넉넉한 웃음을 잃지 않았지만 외로웠던 허세욱의 사진 앞에서 자신들의 무능과 무책임을 성찰하며 다시는 민중의 죽음을 불러오지 않겠다는 결기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허세욱이 분신자살한 5년 뒤인 2012년 5월 14일. 해고 노동자로 노동운동에 헌신하던 박영재가 온몸에 불을 붙였다. 그가 분신을 결행한 곳은 통합진보당 당사 앞이다.
박영재.
그는 충청도 서산에서 태어나 수원으로 옮겨와 버스 노동자로 일했으나 노동운동으로 해고당했다. 복직 투쟁과 더불어 비정규직 및 미조직 노동자들을 지원하고 조직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민주노동당에는 2005년 입당해 궂은 일을 도맡아 했다고 지인들은 입을 모은다. 수원 비정규센터 사무국장을 거쳐 2010년부터 소장으로 일했다. 그 바쁜일정에서도 분신하는 그날까지 방송통신대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어느 인터넷신문은 그를 "헌신과 열정의 참 노동자, 참 당원"이라고 썼다. 분신 뒤 병원으로 급히 옮겨져 사투를 벌였지만 상상을 초월한 고통 속에 고인은 어린 자녀들을 남기고 끝내 6월 22일 운명했다. 마흔네 살이었다.
문제는 누가 그를 죽였는가에 있다. 진보에 묻는다. 이명박 정권의 신자유주의 체제가 그를 죽였는가? 아니면 노동 억압적인 분단체제가 그의 목숨을 앗아 갔는가? 아니면 언론권력 '조중동'이 죽였는가?
물론, 그들 모두 전여 '혐의'가 없지는 않다. 고인은 노동 억압적인 분단체제에서 해고당했고, 신자유주의 체제와 맞서 촛불이든 1인 시위든 줄기차게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몸을 불사르기로 결심한 날, 새벽에 당에 보낸 편지에서도 그는 '조중동'이라는 말을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정치권력 · 경제권력 · 언론권력, 그 3각 동맹인 철의 권력이 박영재를 죽였을까? 아니다. 그들 못지 않게 더 직접적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엄연히 있다. 누구인가?
마흔네 살의 올곧은 노동자를 죽인 사람들, 그들은 바로 통합진보당의 '엘리트'들 아닌가. 총선이 끝난 뒤 비례대표 후보선출과정에서 드러난 '부정 · 부실선거'를 놓고 이른바 당권파와 비당권파사이에 벌어진 갈등과 추태는 진보정당을 희망으로 생각한 사람들에게 큰 실망, 아니 절망을 주었다.
고 박영재의 상심은 더 컸을 터다.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에서 단상으로 달려오던 고인의 분노로 가득 찬 얼굴은 인터넷과 조중동은 물론 진보언론에도 1면에 큼직하게 실렸다. 그가 자신의 울뚝밸 치민 얼굴 사진에서 얼마나 짙은 외로움을 느꼈을지 감히 짐작할 수 있다.
고인은 분신한 날 새벽 3시 9분에 "유시민, 심상정 공동대표님 통합의 정신으로 돌아오십시오!" 제하의 호소문에서 "야권연대를 파기하고 2012년 대선을 이겨 영구 집권을 꾀하는 새누리당과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보수언론 도움에 힘입어 통합진보당의 당권을 장악하려는 불법적인 행위를 멈추고 통합의 정신으로 돌아오십시오."라고 썼다. 이어 "이석기 국회의원 당선자가 그렇게 부담스럽습니까? 국가보안법으로 실형을 살았던 자주적, 민주적, 통일 국가를 건설하려는 동지로 인해 격조 높은 명망가에서 조중동 빨갱이 색깔 공세의 흙탕물이 튈까 두렵습니까?"라고 되물었다. 왜 그가 분신했는지 판단할 수 있는 대목이다.
노동자 박영재의 쓸쓸한 죽음을 두고 가당찮은 중립에 설 생각은 없지만, 고인이 애오라지 희망이었던 당에서 당권파든 비당권파든 갈등을 풀어가는 방식에 개탄했던 사람은 과연 나 혼자였을까?
조급하게 몰아치듯 당권파를 공격해가는 비당권파의 납득하기 어려운 행태는 그 갈등의 와중에 '애국가' 공세까지 서슴지 않는 모습에서 극에 달했다. 1
하지만 그 못지 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실망스러운 것은 당권파들의 자세였다. 마치 아무 잘못도 없다는 투의 언행은 고통받고 있는 유권자가 대다수인데도 왜 진보정당이 국회 원내 교섭단체조차 얻는데 실패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드러내 주었다.
설령 스스로 정당하다고 확신하더라도 당의 단합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물러나며 수습에 나설 상황에 놓인 이석기가 자신이 무너지면 줄줄이 무너진다고 언죽번죽 이야기하는 모습을 어떻게 보아야 옳은가. 다른 사람에겐 겸손의 덕목을 들먹이며 정작 자신은 더없이 교만한 전형적 작태 아닐까. 이석기와 당권파들의 행태에서 자주파의 미덕이라는 품성론을 읽을 수 있는가? 대중과 더불어 호흡한다는 자주파의 정신은 고작 국회의원이나 '군소정당'의 당권 앞에서 판단이 흐려지는 정도였던가? 그들은 이승에서 박영재가 떠나는 마지막 영결식 자리에서도 여전히 핏발 선 어조로 당권에 집착하는 '추도醜徒'를 서슴지 않았다. 4월에서 8월까지 모든 진보에게 묻는 까닭이다. 박영재를, 허세욱을, 누가 죽였는가를.
- 조중동이 통합진보당을 겨눠 종북의 색깔을 짙게 물들이고 있을 때 당 공동대표의 한 사람인 유시민이 "당행사에서 우리는 왜 애국가를 부르지 않느냐"고 한 발언은 비이성적인 판단을 부추기고 종북 이미지를 굳혀주는 '세련된 색깔 공세'에 다름 아니다. 실제로 조중동은 유시민의 발언을 대서특필하고 사설과 칼럼으로 뒷받침했다. 명토박아두거니와 애국가를 불러서는 안된다는 뜻이 아니다. 국가주의를 확대할 우려가 있어 애국가 부르기를 자제했던 진보정당에 조중동이 종북 공세를 펼 때 유시민이 그 말을 한 이유는 나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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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이완구 원내대표는 안철수 의원이 국회에 등원했을 때 덕담으로 이런 말을 했다.
"바깥에서는 명성도 있고, 인품도 좋게 보이시는 분들이 국회에만 오면 사람이 달라진다."
아주 정확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역사적 접근으로 봤을 때 한 정당의 뿌리는 친일파, 독재, 기득권들의 모리배들이 모인 곳이고, 또 한 정당은 그 모리배들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전자는 지금도 확실하고 유효하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아 보인다. 양극화를 막지 못했고, 서민들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했다. 오히려 중앙권력에 동화되어 흡수된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결국 자신이 가지고 있던 뜨거운 열정과 눈물은 사라진지 오래된 분들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야성을 회복해야 정치도 복원될 것이라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궁극적인 사회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모리배를 자처하는 사람들까지 포용해야 진정한 공화국이 탄생할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모리배는 끊임없이 권력에서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야성의 회복은 곧 정의의 회복일 것이다. 정의의 실현은 결국 모리배들의 해체로 이어질 것이다.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불가능한가를 떠나서 이 '정의'라는 것이 얼마나 오래갈지 의문이 든다. 인간의 본성은 너무나 변덕스럽기 때문에 정의로운 정부가 들어섰다 하더라도 그 정의로운 사람들 안에서도 또 다시 권력이 분열될 것이 확실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궁극적으로는 결국 상대방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상생의 길로 가야하는 것인데 모리배들이 원하는 이원집정부제 같은 구조로 간다면 '모리배들 간'의 상생과 화합일 것이다.
반면 정의를 추구하는 세력들이 선거구조를 개편하고 정부구조를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분권형 구조개편으로 간다면 모리배들의 영향력은 많이 줄어들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권력을 잡고 있는 쪽은 모리배들이고 또한 이들은 선거에서 졌을 때도 후방의 압도적인 지원을 받아서 이긴쪽과 대등하거나 위협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이들과 싸우는 것이 지금의 정의지만 또한 그 마저도 힘든 것이지만, 왜 우리 정의로운 세력은 모리배들에게 계속 지는 것인지부터 성찰해야 될 것이다.
앞서 처음 말했던 이완구 원내대표의 말씀처럼 국회는 점점 모리배화 되어가고 있다. 정의를 실현하려는 자들도 모리배들의 인신공격을 흘려보낼 수 있는 성인은 정말로 드물 것이다.
생각해보라, 도둑질 한 사람이 오리발 내밀고 오히려 주인보고 "너희 집안 관리나 잘 해라", "너희가 보안을 잘 안 한게 잘못이지"라 하며 오히려 털린 주인을 욕하는 세상이지 않은가?
상식은 전혀 통하지 않고 그들이 지어낸 소설같은 논리가 진실이되고 현실이되는 세상이 아닌가?
그렇지만 마냥 이런 상황에 모리배들을 탓할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모리배들도 어떻게 보면 사람인데 이들은 맹자가 말하는 사단을 잃어버리고 짐승 보다도 못한 괴물이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불쌍히 여겨 슬퍼할 줄 알고, 착하지 못한 것을 미워할 줄 알고, 겸손하게 남에게 사양할 줄 알고,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인간다운 마음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인간답지 못하다는 것 자체가 벌이고 또한 자신이 그러한지도 모르고 자신의 권력만을 위해 계속해서 괴물같은 행동만을 일삼는 이들은 이미 스스로가 지옥화 된 처지일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행태에 똑같이 전이되어 이들이 성내면 같이 성내고 이들이 이간질 하면 같이 이간질 하고 하는 이런 행태들의 반복적인 경험들이 쌓여 결국 국회는 모리배화 되는 것 같다.
자신을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내지 않을 수 있는 사람, 자기(자아)는 원래 없는 것임을 아는 사람, 흐름에 쓸려가지 않고 묵묵히 버틸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나라를 이끌어갈 사람들이 가져야할 덕목이지 싶다.
이미 자신을 괴물화 시킨 사람들이라 할 지라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꿋꿋히 그들을 설득하고, 그들의 공격에도 굴하지 않으면서 진실된 의정활동을 통하여 진정성을 의심받지 않게된다면 또한 그런 사람들이 점점 늘어갈 수만 있다면 우리 국회의 평화는 올 수 있지 않을까?
행동은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성서의 격언처럼 말을 말뿐인 말이 아닌 진짜로 사람을 사랑하는 휴머니스트가 먼저 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많이 노력해야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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