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세욱과 박영재 누가 죽였는가?
앞서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을 비판했지만 여전히 자기 성찰이 없을 사람들을 위해 정색을 하고 묻겠다.
허세욱, 박영재. 두 노동자를 누가 죽였는가?
그 물음을 4월에서 8월까지 모든 진보와 나누고 싶다. 먼저 허세욱. 그는 빈농의 9남매 가운데 다섯째로 태어났다. 고등학교에 입학에 공부하는 '행복'도 누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삶은 가방 끈 긴 그 누구보다 치열했다. 집회와 시위 현장은 물론, 주요 쟁점에 대한 토론회와 강연회를 빠짐없이 다녔다. 나 또한 서울시청 앞 광장 집회 때와 서울 명동 향린교회에서 열린 강연회 때 겸손이 몸에 밴 고인의 얼굴을 또렷이 기억한다.
고인은 생업인 택시를 몰며 민주노총 노동자로서 당당하게 살아갔다. 참여연대와 민주노동당에도 가입했다. 월간 <노동세상>에 따르면, 고인이 택시로 하루 340여 킬로미터씩 한 달을 꼬박 몰아 손에 쥔 돈은 100만 원 남짓이었다. 고인은 그 돈으로 여러 시민사회 단체 회비와 진보정당 당비를 꼬박꼬박 내고, 단체 활동가의 넉넉하지 못한 생활을 살뜰하게 챙겨주었다. 정작 자신은 끼니 거를 때가 많았다. 그 몸마저 결국 민중에 바쳤다.
2007년 4월 15일 허세욱은 분신의 고통 속에 숨을 거뒀다. 쉿넷. 열정과 헌신으로 살아온 삶이었다. 고인은 4월 1일, 한·미 FTA 협상이 벌어지던 호텔 앞에서 "한 · 미 FTA 즉각 중단하라"며 스스로 몸을 불살랐다. 구급차에 실려 가면서도 마지막 온 힘을 다해 한 · 미 FTA 중단을 절규했다.
아직도 노무현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면 도끼눈 흡뜨며 대뜸 욕설을 퍼붓는 윤똑똑이들에게 명토박아 들려준다. 당시 대통령 노무현은 허세욱이 분신한 바로 그날 밤 협정을 '타결'했다.
그 뒤 노무현은 진보세력의 비판을 받았고, 민주당은 재집권에 실패했다. 하지만 어떤가. 한 · 미FTA 협상 실무를 대표했던 자들을 보라. 김현종은 삼성전자 해외 법부담당 사장으로 '변신'했고, 김종훈은 새누리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가 강행한 한 · 미FTA 협정의 국회 비준을 저지하기 위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민주당은 국회에서 몸싸움을 벌여야 했다. 참으로 해괴한 사태 아닌가. 결국 국회에서 날치기로 비준됐다.
그래서다. 나는 민주당이 김대중과 노무현의 사진을 걸어놓고 집권을 다짐하기보다 언제나 넉넉한 웃음을 잃지 않았지만 외로웠던 허세욱의 사진 앞에서 자신들의 무능과 무책임을 성찰하며 다시는 민중의 죽음을 불러오지 않겠다는 결기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허세욱이 분신자살한 5년 뒤인 2012년 5월 14일. 해고 노동자로 노동운동에 헌신하던 박영재가 온몸에 불을 붙였다. 그가 분신을 결행한 곳은 통합진보당 당사 앞이다.
박영재.
그는 충청도 서산에서 태어나 수원으로 옮겨와 버스 노동자로 일했으나 노동운동으로 해고당했다. 복직 투쟁과 더불어 비정규직 및 미조직 노동자들을 지원하고 조직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민주노동당에는 2005년 입당해 궂은 일을 도맡아 했다고 지인들은 입을 모은다. 수원 비정규센터 사무국장을 거쳐 2010년부터 소장으로 일했다. 그 바쁜일정에서도 분신하는 그날까지 방송통신대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어느 인터넷신문은 그를 "헌신과 열정의 참 노동자, 참 당원"이라고 썼다. 분신 뒤 병원으로 급히 옮겨져 사투를 벌였지만 상상을 초월한 고통 속에 고인은 어린 자녀들을 남기고 끝내 6월 22일 운명했다. 마흔네 살이었다.
문제는 누가 그를 죽였는가에 있다. 진보에 묻는다. 이명박 정권의 신자유주의 체제가 그를 죽였는가? 아니면 노동 억압적인 분단체제가 그의 목숨을 앗아 갔는가? 아니면 언론권력 '조중동'이 죽였는가?
물론, 그들 모두 전여 '혐의'가 없지는 않다. 고인은 노동 억압적인 분단체제에서 해고당했고, 신자유주의 체제와 맞서 촛불이든 1인 시위든 줄기차게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몸을 불사르기로 결심한 날, 새벽에 당에 보낸 편지에서도 그는 '조중동'이라는 말을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정치권력 · 경제권력 · 언론권력, 그 3각 동맹인 철의 권력이 박영재를 죽였을까? 아니다. 그들 못지 않게 더 직접적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엄연히 있다. 누구인가?
마흔네 살의 올곧은 노동자를 죽인 사람들, 그들은 바로 통합진보당의 '엘리트'들 아닌가. 총선이 끝난 뒤 비례대표 후보선출과정에서 드러난 '부정 · 부실선거'를 놓고 이른바 당권파와 비당권파사이에 벌어진 갈등과 추태는 진보정당을 희망으로 생각한 사람들에게 큰 실망, 아니 절망을 주었다.
고 박영재의 상심은 더 컸을 터다.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에서 단상으로 달려오던 고인의 분노로 가득 찬 얼굴은 인터넷과 조중동은 물론 진보언론에도 1면에 큼직하게 실렸다. 그가 자신의 울뚝밸 치민 얼굴 사진에서 얼마나 짙은 외로움을 느꼈을지 감히 짐작할 수 있다.
고인은 분신한 날 새벽 3시 9분에 "유시민, 심상정 공동대표님 통합의 정신으로 돌아오십시오!" 제하의 호소문에서 "야권연대를 파기하고 2012년 대선을 이겨 영구 집권을 꾀하는 새누리당과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보수언론 도움에 힘입어 통합진보당의 당권을 장악하려는 불법적인 행위를 멈추고 통합의 정신으로 돌아오십시오."라고 썼다. 이어 "이석기 국회의원 당선자가 그렇게 부담스럽습니까? 국가보안법으로 실형을 살았던 자주적, 민주적, 통일 국가를 건설하려는 동지로 인해 격조 높은 명망가에서 조중동 빨갱이 색깔 공세의 흙탕물이 튈까 두렵습니까?"라고 되물었다. 왜 그가 분신했는지 판단할 수 있는 대목이다.
노동자 박영재의 쓸쓸한 죽음을 두고 가당찮은 중립에 설 생각은 없지만, 고인이 애오라지 희망이었던 당에서 당권파든 비당권파든 갈등을 풀어가는 방식에 개탄했던 사람은 과연 나 혼자였을까?
조급하게 몰아치듯 당권파를 공격해가는 비당권파의 납득하기 어려운 행태는 그 갈등의 와중에 '애국가' 공세까지 서슴지 않는 모습에서 극에 달했다. 1
하지만 그 못지 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실망스러운 것은 당권파들의 자세였다. 마치 아무 잘못도 없다는 투의 언행은 고통받고 있는 유권자가 대다수인데도 왜 진보정당이 국회 원내 교섭단체조차 얻는데 실패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드러내 주었다.
설령 스스로 정당하다고 확신하더라도 당의 단합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물러나며 수습에 나설 상황에 놓인 이석기가 자신이 무너지면 줄줄이 무너진다고 언죽번죽 이야기하는 모습을 어떻게 보아야 옳은가. 다른 사람에겐 겸손의 덕목을 들먹이며 정작 자신은 더없이 교만한 전형적 작태 아닐까. 이석기와 당권파들의 행태에서 자주파의 미덕이라는 품성론을 읽을 수 있는가? 대중과 더불어 호흡한다는 자주파의 정신은 고작 국회의원이나 '군소정당'의 당권 앞에서 판단이 흐려지는 정도였던가? 그들은 이승에서 박영재가 떠나는 마지막 영결식 자리에서도 여전히 핏발 선 어조로 당권에 집착하는 '추도醜徒'를 서슴지 않았다. 4월에서 8월까지 모든 진보에게 묻는 까닭이다. 박영재를, 허세욱을, 누가 죽였는가를.
- 조중동이 통합진보당을 겨눠 종북의 색깔을 짙게 물들이고 있을 때 당 공동대표의 한 사람인 유시민이 "당행사에서 우리는 왜 애국가를 부르지 않느냐"고 한 발언은 비이성적인 판단을 부추기고 종북 이미지를 굳혀주는 '세련된 색깔 공세'에 다름 아니다. 실제로 조중동은 유시민의 발언을 대서특필하고 사설과 칼럼으로 뒷받침했다. 명토박아두거니와 애국가를 불러서는 안된다는 뜻이 아니다. 국가주의를 확대할 우려가 있어 애국가 부르기를 자제했던 진보정당에 조중동이 종북 공세를 펼 때 유시민이 그 말을 한 이유는 나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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