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와 장자를 마주하다 보니 인간의 실체와 '진실함'이라는 화두를 접하고 나는 혼란스러워 졌다. 이제까지의 삶을 돌이켜보며 나가 행해왔던 많은 행위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다보니 '나'라는 것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 친구도 그렇고 사람들의 말도 그렇고 하나 하나 회의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진실과 마주하는 것은 정말 어려웠다. '나'를 벗겨내는 작업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다.
실체에 다가갈수록 나는 점점 나에게만 집중하게 되었다. 공자의 仁도 조작된 것이고, 불교도 '나'를 지우는 아편에 불구하고, 이제까지 내가 사랑했던 동양철학마저도 나약한 나의 결핍을 채우기 위한 모르핀이 아니었는지 의심하게 되었다.
회의주의에 빠지면서 자연스럽게 부정적인 마음이 나의 주인이 되었고 나는 점점 나를 골몰히 생각하는 것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 주변 사람들에게 '화'라는 감정을 간간히 접하게 되면 나도 같이 옮아서 화가 났다.
계속해서 골똘히 생각하고 또 멍하니 있고 하는 시간을 보내면서 어느 순간 김재익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5공화국의 경제 대통령인 김선생님은 평소에 화를 내지 않으신다고 했다. 주위 사람들이 하도 답답해서 "왜 자네는 그런 수모를 겪으면서 화를 내지 않는가? 한 번쯤 낼법도 한데!"라고 외치면 차분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저 사람들도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거겠지. 내가 화를 낸다고 바뀌는 게 무엇이 있겠나". 자기를 잊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자신의 주인이기 때문에 화를 내지 않겠다라는 의지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보통 나같은 경우는 상대방이 나에게 화를 내면 그것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상대를 원망하게 된다. 나는 이렇게 그릇이 좁다. 김선생님처럼 자신을 컨트롤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내가 실체를 탐구한 계기는 지금 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나를 나아가게 하지 못했다. 오로지 실체에만 집중하느라 '道'를 잊어버렸다. 마음은 점점 무거워지는 듯하고 상대를 이해하는 마음도 나지 않았다. 나의 한계였다.
그러나 이렇게 혼란스러우면서도 나의 한계를 깨닫고 다시 한 번 나를 돌아보는 과정을 통해서 느낀 게 많다. 이 어리석음을 깨우쳐 준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이해함'과 '내려놓기'이다. 세상을 알지 못하고 나를 알지 못하면 세상도 이해할 수 없고 나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나를 알고 세상을 알게되면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다. 이해하는 것을 흉내내지 않고 내려놓는 것도 흉내냄이 아니라는 무거운 진실에서 멀어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이제까지 만들어진 나와 만들어진 관계 속에서 나가 나로 고착되었을테지만 이것을 벗겨내는 것이 쉬운일은 아닐테지만 무거운 한 걸음 한 걸음 디딜 때마다 생겨나는 발자국을 벗삼아 내가 만들어 놓은 산에도 오르고 아직 보이지 않지만 훗날 오를 산들을 위해 건강한 마음 먹자.